부산의 3ㆍ1 운동은 개항 이후 일본인의 이주와 조선인 공동체의 파괴, 일본인의 경제력 장악과 조선인 상권의 쇠퇴 등 조선인의 '동래'가 일본인의 '부산'으로 변신하는 과정에 대한 조선인의 대응이었다.
1919년에 전국적으로 일어난 3ㆍ1운동은 일제시대 민족해방운동을 상징하는 일대 사건이었다. 식민 지배를 받았던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는 찾기 어려운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가장 광범위한 지역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참여하여 3개월동안 진행된 3ㆍ1운동은 비록 민족해방을 바로 쟁취하지는 못했지만 세 가지의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첫째, 일제의 통치방식을 변화시켰다. 수원 제암리 학살사건과 같이 야만적인 폭력을 동원하면서 급한 불을 끈 일제는 3ㆍ1운동의 재발을 막기 위해 무단통치를 문화통치로 변경했다. 둘째, 모든 신분, 계급, 지역의 사람들이 이 운동에 참여함으로써 주민들이 하나의 민족으로 결집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구성적 존재인 '민족'이라는 관념은 3ㆍ1운동 과정을 통해 역사적 '실체'로 드러났다. 셋째, 이 운동에 의해 민주공화제 이념이 확고해졌다. 3ㆍ1운동을 계기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민주공화제의 이념은 오늘날 한국의 헌법 제 1조로 계승되었다.
부산의 3ㆍ1운동은 3월 11일 부산진 일신학교 학생시위에서 시작되었다. 이보다 앞어 비밀결사운동을 통해 시도되었던 부산상업학교의 시위는 경찰에 의해 무산되었지만,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의 시위가 3월 13일 동래장날에 수천 명의 주민과 함께 대규모 시위로 전개되었다. 18일과 19일에는 범어사의 명정학교와 지방학림의 학생과 군중이 합류하여 동래시장에서 시위를 멀였다. 29일에는 구포장날에 맞춰 대규모 집회가 일어나 지역에서 일제의 상징일 파출소를 습격했다. 4월 5일 기장읍 장날에도 청년층이 중심이 되어 주민 1,000여 명이 궐기했고 장안ㆍ일광ㆍ정관면에서도 시위를 전개했다. 당시 부산에서 3ㆍ1운동에 참가한 인원과 시위 횟수는 전국에서 경기도와 황해도 다음으로 많았고 사상자와 관공서 파괴등은 가장 많았다.
3ㆍ1운동의 대표적 공간으로서 잘 알려진 천안 아우내장터와 같이 부산의 3ㆍ1운동도 주로 장날에 맞춰 전개되었다. 장날, 장터가 지닌 사회경제적 기능때문이다. 일제시대에 장날, 장터는 조선인끼리 상품유통이나 유대관계 측면에서 중요한 시간이자 공간이었다. 조선인은 장날에, 장터에 가서 자신의 물건을 팔고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는 경제활동을 영위했다. 또한 통신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에 장날은 만남과 모임의 시간이었다. 사람들은 장날에 장터에서 경제활동과 더불어 친목을 도모하고 정보를 공유했다. 특히 외부 출입이 자유롭지 않았던 여성도 장날에는 거리낌 없이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장날과 장터는 조선인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나 모이는 시공간이었다. 한국 현대사에서 민주주의 역사를 만든 수많은 광장과 같은 '아고라'였다.
오늘날 동래와 구포시장을 방문하면 이러한 부산 3ㆍ1운동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부산은 구 대동병원사거리 맞은편 입구-동래시장-동래구청-복천박물관입구까지의 도로를 동래 만세거리로 지정하고 수안파출소 옆에 동래 만세거리 기념비를 설치했다. 그리고 구포동 구포역 앞-구포시장통-대리천 복개도로까지의 도로를 구포 만세거리로 지정하고 낙동강 제방 위에 자연석 기념비를 세워 3ㆍ1운동을 기념하고 있다. 매년 3ㆍ1절을 맞아 학생, 시민과 '함께' 3ㆍ1운동 재현행사를 개최하여 운동의 정신을 계승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있다. 실제로 동래와 구포의 만세거리 코스를 따라 거닐면 이곳이 과연 만세거리였는지 생각하게 하는 요소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3ㆍ1운동 때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이곳에서 시위했던 조선인의 슬픔과 '환희'를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공간이 없다. 코를 자극하는 재래시장의 맛있는 먹거리만 눈에 가득 들어온다. 이곳에서 3ㆍ1운동을 기억하는 자체가 무의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
역사적 사건의 정신을 계승하고 그 현장을 보존하는 일은 단순히 사건의 이름만 기억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특히 역사적 현장은 방치하고 막대한 비용을 들여 한적한 산에 거대한 3ㆍ1 독립운동기념탑을 세운다고 해서 3ㆍ1 운동에 참가한 조선인의 정신이 기려지는 것은 아니다. 거대한 기념탑보다 동래와 구포 만세거리에 크지는 않더라도 그 당시 시위 참가자의 형상물을 세우고 거리 바닥에 3ㆍ1 운동을 묘사한 그림을 그려 놓으면 어떨까. 시대적 맥락을 상상할 수 있도록 아직까지 남아있는 일본식 건축물을 복원하여 만세 거리를 조성하고 작은 기념관이라도 세우는 것이 어떨까.
<일제시대 문화유산을 찾아서> 정태헌 외 지음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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