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 년 11 월 대한민국임시정부 ( 이하 임정 ) 주석 김구가 귀국했다. 그리고 김구는 이듬해인 1946 년 7 월 7 일 일본에 버려져 있었던 윤봉길 ( 尹奉吉 ), 이봉창 ( 李奉昌 ), 백정기 ( 白貞基 ) 삼의사의 국민장을 치룬 뒤 이곳 효창공원에 안치했다. 삼의사는 모두 목숨을 건 의열투쟁을 벌였고 젊은 나이에 죽었다. 윤봉길은 25 세 에, 이봉창은 33 세에. 백정기는 39 세에 죽었다. 희생은 정당성을 상징한다. 특히 젊기에 그 희생은 더욱 순수하다. 해방 직후 젊은 죽음에 대한 애도와 안타까움, 자랑스러움 등이 결합되어 치러진 국민장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앞장에서 서술했 듯이 이는 과거 입정을 중심으로 정국을 주도하기 위한 김구의 정치적 기획의 측면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김구는 삼의사의 묘역을 효창공원에 조성할 때 안중근의 허묘 ( 빈 무덤 ) 도 만들었다. 묘비도 없는 봉분뿐인 빈 무덤은 안중근의 유해를 찾아내겠다는 김구의 강한 의지를 보여준다. 실제로 김구는 1948 년 남북협상 당시 김일성에게 안중근 유 해의 봉환을 제의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통일 후에 추진하자고 답했다. 소련 점령지인 뤼순 ( 旅期 )에 출입하기 위해서는 허가가 필요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래도 김구는 유해의 조사와 발굴을 위해 임정 선전부원이자 안중근의 조카인 안우생 ( 安禹生 )을 평양에 남아있도록 했다. 남북협상은 김구가 정치적으로 재기하는 일대 기회일 수 있었다. 삼의사의 국민장처럼 안중근의 ' 공적 장례'를 통해 김구는 다시 한번 국민적 공감과 지지를 얻으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안중근 역시 삼의사와 마찬가지로 이토 암살이라는 의열투쟁을 전개했고 32 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그런데 의문이 생긴다. 왜 안중근이었을까. 윤봉길, 이봉창은 한인에국단 단원으로 김구의 독립운동과 식접적 관련을 맺고 있었던 이들이었다. 상하이 ( 上海 )에 서 활동했던 아나키스트 백정기도 김구와 간접적인 연을 가졌을 것으로 짐작된 다. 물론 김구는 안중근과 인연이 있었다. 김구는 1894 년 말에서 1895 년 5 월경까지 짧은 기간 동안 안중근의 집에서 함께 지냈다.
동학농민전쟁이 이들 만남의 계기였다. 당시 황해도 해주 지역에서 김구는 농민군의 접주였고 안중근은 아버 지 안태훈 ( 安泰勳 )을 따라 농민군 진압에 나섰다. 이때 안태훈은 청년 김구에게 밀사를 보내 청계동 자택으로 그를 불렀다. 젊은 김구의 " 담대한 기개를 아꼈기" 때문이었다.
이런 연유로 19 세 김구와 16 세 안중근이 만나게 되었다. 김구에게 안중근은 ' 은인'의 아들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적 인연이 허묘를 조성한 동기라고는 보기 어렵다. 개인적인 인연보다는 안중근의 의열투쟁이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냈기 때문일 것이다.
1909 년 10 월 당시 애국계몽운동은 한계에 봉착해 있였고 의병운동은 계속된 탄압으로 침체해 있었다. 국권회복운동의 전반적인 침체 속에서 식민지화는 눈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국권회복운동의 방략을 정비할 필요가 있었고 상당수의 지식인들은 이에 대한 암중모색을 하고 있었다. 이때 안중근이 움직였다. 안중근의 용기 있는 실천은 당대를 살아갔던 조선인들에게 침체된 장국을 극복하고 힘차게 독립운동으로 나아갈 수 있는 희망을 줬다.
수면 아래서 논의되고 있던 무장투쟁 방략은 이제 수면 위로 올라와 실천으로 옮겨졌다. 그런점에서 독립운동의 새 장을 연 청년 안중근의 죽음은 김구가 추구하는 통일국가의 정통성을 뒷받침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이 점이 주인은 없어도 가장 상석에 허묘가 있었던 이유 아니었을까.
그러나 허묘는 이후 2010 년까지 안중근을 기억하는 공간이 되지 못했다. 추도식. 추념식 등 수많은 안중근 기념사업이 있어왔지만 효창공원에서 진행된 적은 없었다. 기념사업을 추진했던 이들조차 허묘를 기억하지 않았던 것이다. 누구의 것인지 알려주는 안내도, 묘비도 없는 봉분을 시민들이 안중근의 허묘라고 알기 는 어려웠을 것이다.
왜 이렇게 잊혔을까. 기억의 형성 과정이 대중에 의해 자연스럽게 ' 아래로부터' 어루어지지 못하고, 정치세력에 의해 ' 위로부터' 이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 현실 권력'의 정당성을 뒷받침하기 위한 ' 기억 만들기'는 권력을 장악해야 가능하다. 반대로 권력 장악에 실패하면 애초에 의도했던 기억은 잊히도록 강요받게 마련이다. 김구의 정치적 실각과 암살 이후 허묘가 안중근을 기억하는 공간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 이를 말해준다.
안중근 허묘에 사람들의 발걸음이 모이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순국 100 주년이었던 2010 년 3 월 26 일이 허묘 앞에서 비로소 첫 번째 추모제가 열렸다 그리고 이 무렵이 되어서야 빈 봉분 옆에 이곳이 안중근의 허묘임을 알려주는 표지석이 설치되었다. 안중근 허묘가 있는 삼의사 묘역에 이르면 허묘보다는 삼의사의 묘를 먼저 보게 된다. 묘비가 없다는 사실이 주는 시각적 효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허묘를 바라보면 여러 생각이 떠오른다. 먼저 유해의 행방이 궁금해진다.
1910 년 3 월 26일 사형 집행 후 안중근의 가족들은 유해 인도를 요청했다. 이 요청은 법률상 수용되어야 했다. 그러나 일제는 이를 거부하고 뤼순 감옥묘지에 매장해 버렸다. 안중근의 묘역이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지 않을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이는 물론 일본의 불법적 행위였다. 여기서 우리는 가족들의 유해 인도 신청을 거부한 제국주의의 비인도 성과 불법성을 볼 수 있고, 유해조차 두려워했던 제국주의의 허약한 이면도 볼 수 있다. 그리고 해방 직후 허묘가 만들어질 만큼 우리 독립운동사의 한 획을 그었던 안중근의 실천이 가지는 의미를 되새겨볼 수도 있다. 그러나 "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봉환되면 모셔질 자리로 1946 년에 조성된 허묘 “라고 쓰여 있는 표지 석은 우리의 여러 생각을 좁히려고 한다.
이 작은 표지식에서 오늘날의 유해 발굴 의지가 오버랩된다. 유해를 찾겠다는 현재의 의지를 알려주는 이 문구는 우리의 사고를 오직 유해 발굴로 집중시키고 만다.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순국한 독립운동가의 유해를 찾는 일에 공감하지 않을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 더 차분하게 생각해 보자, 100 년이 지난 지금 그의 유해를 찾아야 한다는 것과 찾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다른 문제이지 않을까. 1948 년에 평양에 남았던 안우생은 1970 년대 중반 안중근 유해 발굴단장으로 중국에서 조사를 진행했지만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이후 남과 북은 각각 조사단을 파견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가장 최근인 2008 년 3 월에 진행된 남측 정부의 유해 발굴 사업 역시 성공하지 못했다. 그 후 정부는 유해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일차적이라고 판단하고 자료 수집을 위해 일본에 조사단을 파견하기도 했다. 정확한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문서자료를 확보하면 그와 관련하여 새로운 사실이 많이 밝혀질 것이다. 그래도 남는 문제는, 자료를 확보하더라도 안중근의 유해가 지금도 그곳에 남아 있으리라고 확신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안중근은 유해의 존재 유무와 무관하게 그의 삶 자체가 더 큰 의미가 있다. 유해를 찾을 수 없어도 허묘는 가치 있는 유적지이다. 작은 봉분이 지만 안중근의 삶을 상징의 징표로 담아 놓은 봉분은 해방 이후 국가건설운동까지 아우르면서 우리에게 성찰의 기회를 주고 희망의 메시지를 제공하기 때문이 다. 유해 발굴 사업은 중요하다. 그런데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안중근의 삶과 실천에서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과정이 아닐까. 이 작은 붕분이 무엇 인지를 알려주는 표지는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표지석이 우리의 여러 생각을 오직 안중근의 유해를 찾아야 한다는 의지로만 모아내려고 한다면 오히려 안중근 에 대한 사고를 좁히는 우를 범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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