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1945년 기간은 일제가 도발한 전쟁을 뒷받침하기 위해 허구적인 '내선일체'구호 속에 조선의 인력과 물자가 철저하게 동원되고 수탈되는 폭압적인 통제체제가 구축된 시기였다. 당시 조선인들은 이에 휩쓸려 소모되면서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저항했다. 독서회를 비롯한 비밀결사운동, 동맹휴학 등의 조직적인 저항에서 노동자의 의도적인 태업, 일자리 탈출과 같은 개인적인 저항에 이르기까지 수타로 인한 삶의 피폐화에 대해 끈질기게 저항했다.
중일전쟁 이후 일제 경찰의 검거 상황을 보면 사상사건의 경우 1937년 201건/2,600명에서 1942년 586건/2,872명으로, 치안유지법 위반사건의 경우 1937년 91건/1,265명에서 1942년 172건/1,528명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저항의 빈도는 늘어났다. 물론 일제의 그물망 감시로 조직 활동이 어려워져 사건당 인원수가 줄어든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인의 저항은 더욱 소규모 화하면서 은밀하게 전개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1940년 11월 23일 부산공설운동장(현재 구덕운동장)에서 개최된 제2회 경상남도학도전략증강국방경기대회에서 민족차별의 계기로 발생한 부산 항일학생운동은 1,000여명의 학생이 참가한 일제말기 최대 규모의 저항시위였다. 이 대회에서 진행자는 전년도 우승학교인 동래중학교보다 일본인 학교인 부산중학교를 먼저 입장시키고 담가(擔架) 경기 때 동래중학교가 1위를 하자 재시합을 시켰다. 또 무장행군 시에는 전년도 1등을 한 부산 제2상업학교를 가장 불리한 코스에 배치시키는 등 일본인 학교의 우승을 위해 노골적인 민족차별을 가했다.
이러한 민족차별에 조선인 학생들은 울분을 터뜨렸고 일장기 하강식 때 애국가와 아리랑을 부르면서 시위에 나섰다. 이 시위는 지금의 광복동을 거쳐 중앙동으로 이어졌고 대회에서 편파판정을 주도한 부산병참기지사령관 노다이관사까지 습격했다. 그 결과 200여 학생이 검거되었고 주모자 15명은 징계와 함께 구속되었다. 고문이 얼마나 심했는지 혈기왕성한 젊은 학생인데도 2명은 후유증으로 결국 순국했다. 이 시기 발생한 대부분의 동맹휴학이 주로 과다한 실습이나 교과목 등 학내 문제를 계기로 일어난 경우와 달리, 부산항일운동은 전시체제의 억압이 극심한 상황에서도 식민지 사회의 근본적인 민족차별의 모순을 전면적으로 부각했다. 결코 이뤄질 수 없는, 일제 스스로도 실행할 의지가 전혀 없던 '내선일체'의 허구성을 여지없이 드러낸 것이다.
현재 부산항일학생운동 기념물은 운동의 발생지인 구덕운동장 앞 광장 입구에 세워진 표지석과 2004년 11월 부산항일학생의거기념사업회(이하 기념사업회)가 청소년에게 운동의 정신을 알리고자 부산어린이대공원 내 학생교육문화회관 광장 옆에 세운 부산항일학생기념탑 등 두 곳에 있다. 부산항일학생운동은 2004년에 기념탑이 세워지기 전까지 발생지에 단촐한 표지석으로만 기억될 뿐이었다.
부산항일학생기념탑은 운동에 참가한 학생들을 상징하는 군상(群像)을 동서로 배치했고 그 가운데 주탑은 항일 정신을 의미하는 횃불이 한국을 상징하는 태극문양을 감싸고 활활 타오르는 모습으로 조형되었다.
아래 글은 기념사업회가 2004년에 쓴 추모문의 주요 부분이다.
"이 의거는 일제 말기 전시체제하에서 전개된 국내 최대 규모의 항일학생독립운동이었다. 만시지탄은 있으나 이제 선배님들의 드높은 애국심과 의연함에 깊이 머리 숙이며 그 숭고한 뜻을 이 탑에 담아 시민정신의 큰 뿌리로 승화시켜 영원히 기리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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