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산 기슭에 버려진 죽음ㆍ망우리 공원

망우리에 있는 망우산은 1933년부터 서울 ( 경성 )의 공동묘지로 이용되어, 일제시 대의 많은 역사적 인물들이 묻혀있다. 망우리 공동묘지로 불리다가 1999년에 공원화 작업이 이루어져 현재는 묘지공원으로 조성돼 망우리 공원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1973년에 만장 ( 滿葬 ) 되었고, 2009년 현재 부지 1,758,877㎡ 에 묘수 15,383기가 있다. 망우리 공원에 조성된 산책로는 관리사무소에서 출발해 동락천 약수터 방향과 용마산 방향으로 나눠진다. 산책로는 관리사무소에서 출발해 다시 처음 위치로 아오는 총 5.2 km의 거리이다. 망우리 공동묘지는 양지바른 동쪽 ( 경기도 방향 )부터 무덤이 들어선 후 점차 서쪽( 서울 방향 )으로 확대되어 갔다. 따라서 현재 망우리 공원의 많은 무덤들이 동쪽에 있고, 우리가 망우리 공원에서 찾아보기로 한 무덤들도 주로 동쪽에 있다. 먼저 삼학병의 묘역을 찾아본다. 삼학병 묘역은 학병동맹사건으로 사망한 세 학생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학병동맹사건은 일제강점기에 일어난 사건은 아니다.

 

1946년 1월 18일 우익 계열의 '반탁전국학생총연맹'이 서울 정동교회( 貞詞教會 )에서 '반탁시국강연회'를 개최한 뒤, 약 600여 명의 학생들이 가두시위를 벌였다. 그러자 미리 잠복해 있던 학병동맹원들이 무기와 곤봉 등을 가지고 시위 학생들을 습격, 40여 명의 학생들이 부상을 입고, 그중 몇 명은 중상을 입어 입원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학병동맹은 학도병 출신의 좌익 성향 학생들이 만든 단체였다. 학병동맹의 습격을 받은 우익 학생들은 바로 을지로 입구에 있는 인민보사( 人民報社 )와 인민당 본부 및 서울시 인민위원회를 습격했다. 이때 학병동맹원들은 소지하고 있던 무기를 갖고 반격했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무장경찰이 출동했다. 시가전을 방불케 하는 진압과정에서 학병동맹원 세 명이 사망한 것이다. 망우리 공동묘지가 공원으로 바뀌면서 유명한 인물들의 무덤 입구에 연보비 ( 年譜碑 )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삼학병 묘역에는 연보비도, 이정표도 없다. 삼학병 묘역은 철책 안에 있다. 삼학병 묘역은 들어가는 길부터 방치되어 있다. 무덤 역시 마찬가지이다. 봉분은 풀이 다 죽어서 곳곳에 흙이 그대로 들어나 있고 무너져 내린 곳도 있다. 무덤의 주위에는 잡초가 무성하여 상석과 비석을 가릴 정도이다. 무덤에는 다른 장식은 없고 상석과 비석만 있다. 개인에 대한 설명은커녕 태어난 연월이나 본관도 적혀 있지 않다. 비석 앞에는 하병김명식의사지묘( 學兵金命 根義士之墓 ), 학병박진동의사지묘( 學兵朴晋東義土之墓 ), 학병김성익의사지묘( 學兵金星翼義士之藥 )라고 쓰여 있다. 뒷면에는 '1946년 1월 19일 祖國 을 爲하여 죽다'라고 쓰여 있다. 삼학병들의 장례는 사회단체연합장으로 진행돼있다. 당시 장례를 진행했던 사람들은 삼학병을 ' 祖國'을 위하여 싸우다 죽은 ' 義士'라고 부르며 이곳에 묻었다. 버려졌다는 표현이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무덤이 또 있을까. 일제의 침략전쟁을 겪은 학도병 출신의 이 학생들은 마음속으로 더 나은 ' 祖國'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좌우익의 갈등이 폭력으로 비화되는 와중에 사망한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그들을 ' 빨갱이'라 색칠해 버린 후 잊어버렸다. 이들은 일제강점기에 학도병으로 끌려갔던 어린 학생들이다. 침략전쟁을 몸소 겪은 식민 지배의 피해자들이다. 식민 지배의 피해자들은 학생만이 아니었다. 강제징용으로 노역에 시달린 농민과 노동자들, 성노예로 혹사당했던 여성들이 있다. 식민 지배의 피해자의 죽음은 어디에 있는가, 연보비도 이정표도 없이 버려져 있는 삼학병의 무덤은 우리의 기억에 없는 무수히 많은 죽음의 하나일 수 있다.

삼학병의 묘

 

삼학병의 묘역에서 산책로로 올라와 3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지석영 ( 池鍋水. 1855 ~ 1935 ) 의 무덤 입구임을 알려주는 안내석과 연보비가 있다. 종두법 시행의 선 자이며, 한글보급에 앞장섰던 지석영은 아들 지성주 ( 池盛周 )와 함께 망우리 공원에 잠들어 있다. 지석영의 공로에 비해서 그의 무덤을 찾기는 너무 어렵다. 지석영의 무덤을 찾은 뒤 유상규( 兪相奎 )의 연보비를 발견했다. 유상규는 상하이 임정 시절부터 안창호 ( 安昌浩 )를 도왔던 최측근 인물이다. 안창호의 비서로 흥사단, 수양동우회 등의 활동을 같이 했고 귀국하여 학업을 마치라는 안창호의 권유에 따라 귀국했다. 이후 경성의학 전문학교 외과의사와 강사를 지냈고, 1930 년 조선의사협회 창설을 주도했다. 상규는 안창호를 스승으로서 뿐 아니라 어버이처럼 여겼다. 안창호 역시 유상규의 아들들을 돌봐줬다. 그만큼 두 명은 긴밀한 관계였다. 연보비에는 유상규가 ' 도산의 아들 모양으로 현신적으로 힘을 썼다'라고 쓰여 있다. 안창호는 유상규 무덤 근처에 자신을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리고 유언 대로 안창호의 무덤은 유상규의 무덤 바로 뒤편에 있다. 하지만 1973년 도산공원이 조성되면서 안창호의 무덤은 강남 도산공원으로 이장되었다. 도산공원으로 옮겨 간 안창호의 무덤은 망우리 공원의 무덤과는 다르게 매우 화려하고 아름답게 조성되어 있다. 그러나 죽기 전에 안창호는 유상규 무덤 옆에 묻히기를 원했 다. 살아서 함께했던 동지, 먼저 간 동지의 곁에 머물고 싶었던 ' 인간' 안창호의 소망이 ' 위인' 안창호를 기억하려는 국가에 의해 깨진 셈이다. 유상규는 2007년 건국훈장을 수여받았다. 국립현충원으로 이장될 수 있었다. 하지만 안창호가 떠나 버린 자리를 지키고 싶다는 후손들의 거부로 이장되지 않았다. 안창호가 ' 화려한' 곳으로 떠난 뒤 홀로 남은 유상규. 아쉬운 이별을 했던 두 독립운동가는 그들의 바람과 달리 죽어서도 같이 하지 못한 채 서로 떨어져 지내고 있다.

 

 어린이날을 만들었던 방정환 ( 方定煥 ). 교육자이자 언론인 · 사 학자였던 문일평 ( 文一平 ), 민족대표 33 인으로 언론인이었던 오세창 ( 與世昌 ) 등의 무덤들을 찾아본다. 대부분 방치되어 있었다. 특히 문일평의 묘는 봉분 주변이 무성한 잡초로 덮였고, 상석과 비석도 잡초로 점령당한 상태였다. 이처럼 각 무덤의 관리가 차이가 큰 이유는 망우리 공원이 국가 관리의 묘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관리는 관계자 개인들의 몫이다. 따라서 기념회나 사업회가 있는 인물의 묘는 관리가 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관리가 될 수 없다. 2006년 4월 유홍준 문화재청장과 문화재위원들이 망우리 공원을 찾아왔고 망우리 공원의 문화재 등록을 추진 한다는 뉴스가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 아무 소식이 없다. 망우리 공원의 관리가 허술하다는 지적만 끊이지 않고 계속 나오고 있을 뿐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한용운 ( 韓龍雲 ) 의 무덤에 도착했다. 부인 유 씨의 무덤과 함께 있었다. 다른 무덤들에 비해 단정하게 정리된 그의 무덤이 인상적이다. 한용운의 무덤은 기념사업회가 있기 때문에 잘 정돈되어 있는 듯하다. 대한만국 사람 증에 서 한용운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한용운은 불교계를 대표해 3 · 1 운동을 전개했고, " 님의 침묵'을 지은 대표적인 저항시인이었다. 일생 등 안 실천하고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살았다. 심우장을 총독부가 보이지 않는 북향으로 세운 일, 독립선언문을 작성했던 최남선( 崔南善 )이 변절하자 정신이 죽었다고 그의 장례를 치른 일, 이광수 ( 李光洙 )가 창씨개명을 하고 찾아오자 문전박대하며 쫓아낼 일 등이 그의 저항의식을 보여준다. 그런데 왜 한용운의 무덤은 여기에 남아있는 것일까. 물론 1960년을 전후하여 한 때 만해 한용운의 무덤을 이장하라는 의견도 있었고, 실제 그러한 움직임도 있있다. 하지만 여전히 한용운의 무덤은 이곳에 있다. 당시에 망우리에 남아서 민족과 함께 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는 반론도 있었다고 한다. 유상규의 경우처럼 한용운의 후손들 측에서 국립현충원으로의 이장을 거부한 것은 아닐까, 한용운 무덤을 지나서 조금만 더 걸어가면 조봉암 ( 曺奉巖 )의 무덤을 만나게 된 다.

 

 조봉암은 일제시대에 조선공산당 활동을 했던 대표적인 사회주의자였다. 해방 이후 1946년 좌익 정치세력이 결집한 민주주의민족전선에서 활동하다가 전향하면서 조선공산당과 결별했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에 참여해 조대 농림부장관을 지냈고, 1956년 대통령 선거에 나섰으나 낙선했다. 이후 진보당 활동을 하다 가 1958년 간첩죄 및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진보당원 16 명과 함께 검거되어 사형을 언도받고 1959년 11월 사형이 집행되었다.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최초의 정치적 사법살인이다. 그는 일제강점기에는 조선공산당 간부로 활동했고, 해방 이후에는 간첩죄로 사형되었다. 당연히 국립현충원에 묻힐 수 없었다. 입구를 알려주는 표지석과 연보비 사이에 난 계단을 올라가면 조봉암의 묘가 나온다. 봉분의 앞에는 비석이 있고, 오른편에는 조봉암의 무덤임을 알려주는 문이 있다. 하지만 다른 비문과 달리 비의 뒷면에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다. 원래 비문의 뒷면에는 고인이 사망할 때까지의 약력을 적어 넣는다. 하지만 그의 후손 들은 억울하게 간첩죄로 죽은 아버지의 죽음에 항거하기 위해서, 그리고 언젠가 그의 삶이 온당하게 평가되라는 신념의 표시로 비의 뒷면을 채우지 않았다고 한 다. 이런 후손들의 뜻이 통해서일까. 2011년 1월 드디어 52 년 만에 조봉암의 억울한 간첩 누명이 벗겨졌다. 대법원은 진보당 사건의 재심에서 대법관 전원일치의견으로 조봉암의 무죄를 선고했고, 사법살인을 인정했다. 이날 조봉암의 딸 조호정 ( 曺惠晶 ) 씨는 마침내 부친의 비문에 글을 새겨 넣을 수 있게 되었다고 감격해했다. 그 이후 본 비의 뒷면은 아직 글이 채워져 있지 않았다. 굴곡 많았던 그의 삶을 정리하기에는 아직 시간이 부족했을 것이다. 비어있는 비석의 뒷 면에 채워질 그의 삶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