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유도원도로 배우는 숨은 역사이야기

몽유도원도( 夢遊桃源圖, 비단 채색, 123.2x31,7cm), 이 그림은 왼편 하단부터 현실 세계가 전개되어 환상적인 도원 세계가 오른쪽으로 펼쳐진다. 현실은 부드러운 토산(土山)으로, 도원은 기이한 형태의 암산(巖山)으로 그려졌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점점 높고 웅장하게 표현되었다. 그러나 사람과 동물들은 보이지 않아 중국의 도원도와는 차이가 있다. 마치 신선이 떠나고 없는 산속처럼 다소 적막하고 쓸쓸한 느낌을 준다.

출처 : 한국데이터베이스산업진흥원 안평대군이 꿈에 본 풍경을 안견이 그린 그림으로, 당시 문인들의 찬사가 곁들여졌다. 시,서,화 삼절이 어우러진 조선 초기의 기념비적인 걸작이다. 일찍이 일본으로 건너 가 1939년 일본 국보로 지정받고 덴리대학에 소장되어 있는데, 1996년 겨울에 국내에 반입되어 전시되었다.

 

이 그림을 안견(安堅, 생몰년 미상)이 그리게 된 사연은 이렇다. 1447년 4월 20일 밤, 안평대군(安平大君, 1418~1453)은 무릉도원을 거닐고 있는 꿈을 꾸었다. 박팽년과 함께 봉우리가 우뚝한 산 아래에 이르렀더니, 수십 그루의 복숭아나무가 꽃을 피우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말을 타고 나무 사이로 난 오솔길을 따라갔다. 그러자 갈림길이 나왔다. 잠시 망설이고 있자니, 한 사람이 나타나 말했다.

 "이 길을 따라 북쪽 골짜기로 들어가면 도원에 이릅니다."

두 사람은 말을 몰아 골짜기로 들어갔다. 그러자 첩첩산중에 구름과 안개가 서려있고, 복숭아나무 숲에는 햇빛이 비쳐 노을일고 있었다. 또 대나무 숲에 있는 집은 사립문이 반쯤 열렸는데, 사람도 가축도 없었다. 냇가에 빈 배만이 물결을 따라 흔들리는 매우 쓸쓸한 곳이었다. 안평대군은 박팽년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녕 이곳이 무릉도원이다."

마침 최항과 신숙주도 뒤따라 와 함께 시를 지으며 내려왔고, 그러던 중 잠에서 깨어났다. 안평대군은 곧 안견을 불러 꿈에서 본 도원경을 그리게 하였다.

몽유도원도 표제 : 그림을 그린 지 3년이 지나서 안평대군이 직접 표제와 시를 지었다.

 

그러자 안견은 도연명의 도화원기를 생각하며 꿈의 내용을 단 3일 만에 그려 바쳤다. 그것이 바로 몽유도원도이다.

 그림이 완성되고 3년이 지난 1450년 정월 초하룻날 밤이었다. 치지정(致知亭)에 오른 안평대군은 그림을 다시 펼쳐 놓고는 첫머리에 '夢遊桃源圖'라 제첨을 쓰고, 이어 칠언절수의 시를 감색 바탕의 비단에 빨간 글씨로 썼다.

 

이 세상 어느 곳을 도원으로 꿈꾸었나

은자들의 옷 차림새 아직도 눈에 선하거늘

그림으로 그려 놓고 보니 참으로 좋다

천 년을 이대로 전하여 봄직하지 않는가

世間何處夢桃源 野服山冠尙宛然

著畵看來定好事 自多千載擬相傳

 

안평대군이 시를 짓자, 그를 따르던 집현전의 학자와 문사 20여 명, 그리고 고승 한 명이 그림을  칭찬하는 글과 시를 지어, 모두 23편의 그림의 찬양하는 찬문이 곁들여졌다. 문사로는 신숙주, 이개, 정인지, 박연, 김종서, 서거정, 성삼문, 김수온 등으로 모두 대군과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이다.

 

 안견의 그림과 이들의 시문은 현재 두 개의 두루마리로 나뉘어 표구되어 있는데, 박연의 시문까지가 첫 번째 두루마리에(8.57m), 김종서의 찬시부터 최수의 찬시까지가 두 번째 두루마리에(11.12m) 실려 있다. 이들의 시문은 모두 자필로 쓰여 문학성은 물론 서예 분야에서도 큰 가치를 지닌다. 이로써 몽유도원도는 그림과, 시 그리고 글씨라는 삼절이 함께 어우러진 조선 초기의 기념비적인 걸작이 되었다.

 계유정난 이후 안평대군은 사약을 받고 죽었는데, 안견이 살아남은 일화가

'백호전서 [백호 윤휴(1617~1680) 선생의 문집]'에 전한다.

 

 안견은 충남 서산의 지곡 사람으로 세종의 아들인 안평대군의 총애를 받으며 산수화를 열심히 그렸다. 안평대군은 시문을 몹시 좋아해 당대의 선비들과 두루 사귀었고, 특히 안견의 그림을 좋아하여 그가 잠시도 문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안견도 자기를 알아주는 대군을 위해 몽유도원도를 비롯하여 많은 그림을 그려 주었다.

 그 와중에 안견은 수양대군이 왕위를 친탈하려는 정난의 기운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목숨을 건지고자 대군의 그늘에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안평대군은 끈질기게 곁에 두고 싶어 했다. 생각다 못한 안견이 꾀를 내었다. 중국에서 용매먹을 구해 오자, 안평대군은 안견을 불러 그림을 그리라고 했다. 안견은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다.

 잠시 안채로 들어갔다가 돌아온 대군은 깜짝 놀랐다. 귀하게 여기던 용매먹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안평대군은 즉시 종과 여종을  꾸짖었다. 그러자 그들은 한사코 모른다고 하며 안견에게 일어섰다. 그 순간, 용매먹이 그의 품속에서 떨어졌다. 화가 난 안평대군은 안견을 내쫓고는 다시는 출입하지 말라고 명령 하였다.

 안견은 아무 말 없이 물러 나갔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계유정난(1453)이 일어나고, 정권을 장악한 수양대군은 안평대군을 강화도로 유배시킨 다음 사약을 내려 죽였다. 또 그 집을 드나들던 사람들도 모두 모반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했다. 하지만 안견만이 화를 모면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은 비로소 안견의 예지에 감탄하였다. 어떤 사람은 덕을 품고서도 더러운 행실을 저질러 화를 모면했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높은 식견과 멀리 보는 안목으로 세상을 살았다고 했다.

박팽년의 몽유원서(夢遊源序) │1450년 집현전 학사와 문사 20여 명이 그림을 칭송하는 글을 지었고, 지금은 그림과 글들이 두 개의 두루마리로 나뉘어 표구되었다.

 

 몽유도원도가 언제, 어떻게 일본으로 반출되었는지는 고증이 없다. 현재까지 알려진 비화는 이 그림이 일본 학계에 알려진 뒤 현재의 덴리대학으로 들어가기까지이다. 이 비화는 1977년 덴리대학의 스즈키 나오루 교수에 의해 밝혀졌다.

 몽유도원도를 가장 오래 전에 소장한 사람은 가고시마 출신의 시마즈 히사시루시이다. 이 기록은 몽유도원도의 부속 문서인 '감사증'에 나와있다. 이 증서는 1893년 11월에 발부된 1893년 이전에 이미 일본으로 건너가 있었음이 확실하다. 다만 시마즈가 어떤 경로로 소장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 후, 시마즈의 아들인 시마즈 시게오는 3천 엔을 담보로 이 그림을 가고시마에 거주하는 후지다 사츠미에게 맡겼고, 후지다는 1920년 후반에 소노다 사이지에게 팔았다. 소노다는 오사카에서 전화 소독기를 제조하고 판매하는 '료카 쇼카이'의 사장이었다.

 

 그림을 소장한 소노다는 교토에 있는 학자들에게 두루 보여 주었다. 그러자 나이토 코난이란 사람이 '조선 안견의 몽유도원도에 대한 논문'을 1929년에 발표하였다. 당시 조선 총독부는 수차례에 걸쳐 이 그림을 조선으로 돌려 달라고 요구했으나 번번히 거절당했다.

 1930년, 조선총독부에 근무하던 마쓰타 쿄우는 '조선'이란 잡지에 '안견의 몽유도원도'란 논문을 발표했다. 나이토 코난에 이어 두 번째 논문이다. 하지만 마쓰타의 논문은 나이토가 조선사편수회의 이나바 군잔에 증정한 사진을 보고 쓴것이다. 그 후 몽유도원도는 1933년에 일본의 중요 미술품으로 지정되고, 1934년에는 조선총독부 간행의 조선고적도보에도 실렸다.

이 때의 소장가는 역시 소노다 사이지였다.

 

 1939년에는 그 아들인 소노다 준을 소장자로 몽유도원도는 일본 국보로 지정받았다. 그 후 전쟁에서 패하자, 생활이 몹시 어려워진 소노다 쥰은 1947년에 동경의 용천당에 이 그림을 팔았다.

 용천당에서 구입할 당시 몽유도원도는 편액으로 되어 있고, 시문은 별도의 두루마기에 복잡하게 흐트러져 있었다고 한다.

이 그림은 곧 하 라에 의해 현재의 상태로 표구되었다. 하지만 그림을 모르는 사람이 표구를 하다 보니, 그림보다 3년이나 늦게 쓰인 안평대군의 시가 그림 맨 앞쪽에 배치되었다. 그는 그림을 상하 2개의 두루마리로 표구하되, 바깥은 녹색 바탕에 보상당초문이 있는 비단을 사용하였다.

 1947년경, 국립중앙박물관 초대 관장을 지낸 김재원(1909~1990)이 일본에 갔을 때, 일본의 미술사가 구마가이 노부오가 몽유도원도를 구입할 수 있다는 말을 건넸다. 그러나 당시 어려운 국내 사정으로 수천달러에 이르는 걸작을 무슨 돈으로 살 수 있었겠는가?

 이 천하의 명품이 덴리대학에 들어 간 것은 대략 1950년대 초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그림을 산 대학 측이 대금을 완물한 것이 1955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일이 있다. 사실 이 그림이 1950년에 장석구가 한국으로 가지고 와 판로를 찾은 일이 있었다.

 장석구, 그는 이 나라 골동사를 얘기할 때 약방의 감초 격으로 꼭 따라다니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해방 후 일본인들이 돌아가며 헐값으로 내놓은 국보급 문화재를 산더미처럼 수집하여 호사를 누린 사람이기 때문이다.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은 그는, 17~18세 때 대판옥호상점의 점원으로 있으면서 나이토 지로에게서 상술을 배웠다. 머리가 비상하여 심부름을 하면서 어느새 골동에 대해서도 눈을 떴다. 크지 않은 키에 스포츠형 머리를 하고, 코 아래에는 짧은 수염을 뭉툭하게 길렀다.

 그는 먼저 야스오카와 손을 잡고서 곡물 거래로 돈을 벌더니, 곧 서울 근교의 땅을 사 부동산업자가 되었다. 특히 일제 때 흑석동에 있던 이왕가토지를 평당 2원 50전에 샀는데, 경전에 평당 20원에 넘겨 그 당시 70만원 이라는 거액을 남긴다. 그는 이 돈으로 골동계에 발을 들여놓아 나이토 지로의 소장품과 일본인의 명품들을 모조리 사들이며 하루아침에 대수장가의 반열에 올랐다.

 돈에 욕심이 생기자, 그는 부여수리조합공사를 추진했다. 그런데 그것이 잘못되어 많은 빚을 지게 되었다. 그러자 1948년에는 남산에서 대전시회를 열어 소장했던 다수의 고미술품을 처분했고, 그것도 모자라 다량의 고서화와 불상 등을 미국으로 밀반출해 팔았다. 몇 백 년을 귀중히 내려온 우리의 문화재가 한 개인의 욕심때문에 해외로 마구 흩어져 나간 것이다.

 

몽유도원도가 고국 땅을 밟은 것은 1996년 겨울이다. 우리 민족문화의 우수성을 재조명하기 위해 호암미술관이 개최한 '위대한 문화유산을 찾아서-조선전기국보전'의 출품을 위해서이다. 몽유도원도의 출품을 의뢰받자, 덴리대학은 난색을 표명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조선전기의 수준 높은 문화, 예술적 역량을 대표하는 이 그림을 일본 대학에서 소장하고 있다늕 사실이 한국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질 경우 자칫 민족 감정으로 비화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하지만 미술관 관계자의 끈질긴 노력과 한국 정부의 안전 보장을 약속받은 다음에 출품되었다. 우리는 이 그림을 통해 문화민족으로서의 높은 자긍심을 느낄 수 있었으며 동시에 불행했던 근대사를 돌이켜 볼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