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선도(群仙圖, 국보 139호). 이 그림은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가 1776년 봄에(32세) 그린 도석인물화(道釋人物畵) 중의 대표작으로 그의 작품 중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되었다.
이 그림의 크기는 세로 132.8cm, 가로 575.8cm 지만 원래는 8폭짜리 병풍으로 그려진 것을 6.25사변을 겪으면서 3개의 족자로 분리 표구되어 지금에 전한다.
그림에 나타난 신선들은 중국 신선전(神仙傳)에 나오는 인물들로, 실제로는 살았던 시대가 서로 다르나 8선(八仙)이란 개념으로 통합되어 마치 동일시대의 사람들처럼 보인다. 그림은 삼천 년에 한 번 열린다는 반도(蟠桃, 천도복숭아)가 곤륜산(崑崙山)에 있는 서왕모(西王母)의 집에 열렸따고 하자, 신선들이 약수(弱水)의 파도를 건너 초대되어 가는 모습이다. 그림은 배경이 모두 생략된 채 신선과 그를 모시는 동자를 세 무리로 나뉘어 옛 사람의 시각 습관대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행진시키고 있다.
특히 행진 방향에 따라 인물의 숫자를 줄인 것은 시선을 자연스럽게 왼쪽으로 주목시키게 하고, 등 뒤에서 부는 바람으로 옷자락이 힘차게 나부껴 그림 전체에 생동감과 박진감을 불어넣었다.
신선들의 이름은 그들이 들고 있는 물건으로 추측할 수 있다. 먼저 오른쪽의 무리에서, 외뿔소를 탄 노자(老子)가 일행을 선도하고 그 뒤로 두건을 쓴 종리권(鍾離權), 두루마기에 붓을 든 문창(文昌), 복숭아를 손으로 받쳐 든 동방삭(東方朔)이 보이고, 술에 취해 몽롱한 눈으로 호리병을 들여다보는 이철괴(李鐵拐)와 맨 머리에 강인한 인상을 풍기는 여동빈(呂洞賓)도 보인다. 가운데 족자에는 흰 당나귀를 거꾸로 탄 장과로(張果老), 딱다기를 치는 조국구(曹國舅), 어고간자(漁鼓簡子)와 술통을 든 한상자(韓湘子)가 보인다. 그리고 여신선을 표현한 왼쪽 족자에는 영지를 허리에 매달고 곡괭이에 꽃바구니를 매단 꽃의 여신 남채화(藍采和)와 복숭아를 든 하선고(何仙姑)가 보인다.
이 그림은 종이 바탕에 먹을 주로 해서 청색, 갈색, 주홍색을 곁들여 그렸는데, 인물의 윤곽은 굵은 먹선으로 빠르고 활달하게 그리고, 얼굴, 손, 기물들은 정확하고 섬세하게 처리하였다. 또 옷은 담청을 주로 해서 엷은 음영만 나타내고, 얼굴은 담갈색으로 처리하였다.
화면의 하단에 '병신춘사(丙申春寫)'와 '사능(士能)' 이라는 관기(款記)가 적혀 있고, 그 아래에 '김홍도인(金弘道印)' '사능(士能)' 이라는 낙관이 찍혀 있다. 전체적으로 인물만을 배치한 구성과 제각기 살아 넘치는 인물의 묘사력이 매우 뛰어난 작품이다.
김홍도는 조선 후기의 도화서 화원으로 인물, 산수, 화조, 풍속화에 모두 능한 천재 화가였다. 본관은 김해(金海) 사람으로 자(字)는 사능, 호는 단원, 단구(丹丘), 서호(西湖) 등 여러 개를 썼다. 단원은 명나라의 문인화가 이유방(李流妨)의 인물됨을 흠모하여 그의 호를 따서 자기 것으로 삼은 것이다. 외모가 수려하고 풍채도 좋았으며 넓은 마음씨에 성격까지 활발해 신선과 같았다고 전한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매화 분재를 팔고 있었다. 매우 기이한 것으로 가지고는 싶었으나 김홍도는 살 돈이 없어 안타깝게만 여기고 있었다. 그러던 중 마침 어떤 사람이 그림을 그려 달라며 삼천 냥을 모내왔다. 그러자 김홍도는 이천 냥을 들여 매화를 사고, 팔백 냥으로 몇 말의 술을 사서는 벗들을 모아 매화를 감상하는 술자리를 열었다. 그리고 나머지 이백 냥은 쌀과 땔감을 사는 밑천으로 삼았는데, 이것은 하루 생계조차도 되지못했다.
이 일화를 통해서 김홍도의 통 크고 멋스러운 풍유를 한 눈에 알 수 있다. 강세황의 천거로 궁중의 화원이 된 김홍도는 그의 지도를 받으며 그림의 품격을 높였다. 29세 때에는 영조의 어진(御眞)과 왕세자의 초상을 그리는 영광까지 누렸다. 기예를 인정받은 그는 이듬해에 감목관(監牧官)의 직책을 받아 사포서(司圃署)에서 근무하게 된다.
정조의 총애를 받은 김홍도는 1788년에는 김응환과 함께 왕명을 받들어 금강산과 관동팔경을 두루 기행하며 그곳의 명승지를 그림으로 그려 받쳤다. 이것은 지방을 직접 돌며 산천경개를 감상할 수 없는 임금의 처지를 생각해 화원으로 하여금 승경(勝景)을 대신 그려 오게 한 것이다. 40대 후반에 든 김홍도는 충북 연풍 현감에 제수받아 약 3년간 근무하기도 했다. 이는 화원에게는 파격적인 영광으로 그만큼 정조의 신임이 두터웠던 것을 대변한다. 경상도 문경과 지척인 연풍은 현재 괴산에 속한 면으로 높은 산들이 겹겹이 둘러싸인 작고 아늑한 고장이다.
옛말에 '연풍은 울며 왔다가 울며 떠나는 고장' 이란 말이 있다. 양반으로 태어나 꽃구경 한 번 못하고 온 종일 글공부만 해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있었다. 이제 팔자 좀 펴 보겠다고 송별회까지 마치고 연풍으로 접어든 현감, 사방을 둘러보니 온통 첩첩산중에 시냇물 소리뿐이었다. 백성은 어디에 있고 술을 만들 농토는 어디에 있는가? 기가 막혔다. 그러자 기대만큼이나 억울하고 원통한 생각에 눈물이 저절로 흘렀다.
세월은 흘러 임기가 찬 현감이 연풍을 떠날 때이다. 그는 또 가마 밖을 내다보며 눈물을 뿌려야 했다. 얼마나 평화롭고 행복에 가득 찼던 나날이었던가! 비록 벽촌이지만 먹고 입기에 부족함이 없고 백성들은 검소하고 온순하여 그를 어버이처럼 따랐다. 백성들은 철따라 꿩, 돼지고기를 가져와 잡수라고 권했고, 방안을 향기로 득 채우는 잣죽의 별미, 멧돼지에 송이버섯을 안주 삼아 문경새재의 타는 듯한 단풍을 즐기며 문경 현감과 기울이던 국화주, 말 한 마디 손끝 하나에 정성을 수북이 담아 주는 관속들의 따스하고 흐뭇한 인정미. 아! 어디를 가면 다시 이런 즐거움을 구경할 수 있겠는가!
늙도록 아들을 두지 못한 김홍도는 연풍에 머물며 상암사에 치성으로 불공을 드려 김양기(金良驥)를 얻었다. 그러나 두 해에 걸쳐 삼남지방에 기근이 들어 굶어 죽는 자가 속출하자, 김홍도는 실정(失政)의 책임을 지고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 후 그의 만년에 대한 기록은 없고 다만 병과 가난으로 어려운 생활을 하다가 일생을 마쳤다고만 전한다. 어느 날, 멋들어지게 춘정을 불태웠던 기생을 바라보며 김홍도가 지은 시조가 전한다.
먼데 닭 울었느냐 품에 든 임 가려 하네
이제 보내고도 반 밤이 남으리니
차라리 보내지 말고 남은 정을 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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