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화4년명청자항아리(淳化四年銘靑磁壺순화사년명청호, 보물 제237호), 고려 초기의 청자로 평가받은 이 항아리는 일제 때 발굴되어 조선총독부로부터 보물로 지정받았던 도자기이다. 그것은 항아리의 굽바닥에 '순화사년(淳化四年)'이란 명문(銘文)이 음각되어 서기 993년에 제작된 것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높이 35.2cm의 당당한 크기에 때깔은 담녹조(淡綠調)의 홍갈색 계통이고 전체는 올리브색에 가깝다. 전면에 미세한 유빙렬(釉氷裂)이 있고, 태토는 회백색에 가까우며, 굽다리에는 얇은 내화토(耐火土)의 받친 자국이 여러 군데 나 있다.
6ㆍ25 전쟁이 터지고 3년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의 고문역으로 있던 장규서(蔣奎緖)가 공평동에 있던 골동품 가게 '종로사(鐘路舍)'를 우연히 들렀다. 대학을 위해 고미술품을 수집하던 그는 안국동에 살던 한정수(韓鼎洙)를 찾아가던 길이었다.
종로사 주인 석진수(石鎭壽)는 경기도 광주의 갑부로 해방 후에 혜성처럼 공동계에 등장한 인물이다. 창성동에 고대등 같은 큰집에 살던 석진수는 자금에 구애받지 않으며 골동품을 사 모았고, 조석진(趙錫晉)이 그린 잉어 그림 '군리도(群鯉圖)'를 최병한(崔丙漢)에게서 50만 원(圓)에 사들여 한동안 골동계를 웅성거리게 만들었다. 50만 원이면 쓸 만한 기와집 열 채 값에 해당하는 거금이다. 비싼 값으로 고미술품을 사 준다는 소문이 나자, 그의 집은 문지방이 닳아 없어지도록 서화 골동상들이 들락거렸다. 부산 피난살이를 마치고 다시 서울로 올라온 석진수는 그동안 수집했던 방대한 골동품을 처분하고자 골동품 가게를 낸 것이다.
장규서는 진열장을 둘러보며 감탄어린 목소리로 주인을 칭찬했다. 이 중에서 많은 물건들은 일제 때 인천에서 정미소를 하던 스즈시게가 소장했던 것이었다. 스즈시게는 해방이 되자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이 땅에서 수집한 고미술품을 모두 관리인에게 맡기고 떠났다. 그러나 난리통에 세상이 어지러워지면서 알토란 같던 수집품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돌아다녔다. 누가 나타나지도 않는 주인을 위해 물건들을 보관만 하고 있겠는가?
그때 마루에 걸터앉아 약간 어두운 안쪽을 바라보던 장규서가 깜짝 놀란 눈으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시멘트 바닥에 어지럽게 놓인 잡동사니 더미속에서 눈에 띄는 물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 아, 저 물건이 어떻게 저기 있을까?' 그는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뛰고 정신까지 아득해져 심장이 벌떡벌떡 뛰었다. 아무리 다시 보아도 보물로 지정된 고려 초기의 청자항아리였다.
그는 주인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항아리로 다가가 굽 밑을 쳐다보다 손가락 끝으로 글자를 긁어 보았다. 분명히 음각된 글자의 흔적이 촉감으로 느껴졌다. 그러자 마음은 더욱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예상대로라면 그곳에는 '순화4년계사태묘제일실향기장최길회조(淳化四年癸巳太廟第一室享器匠崔吉會造)'란 명문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을 것이다. 목으로 침이 꿀꺽하고 넘어가며 눈이 파르르 떨렸다. 잡동사니 속에서 대어를 낚은 것으로 이제 가격만 흥정하고 바구니에 넣으면 그만이다.
이 항아리는 고려 태조에게 제사드리는 태묘(太廟)의 제1실에서 쓰기 위해 만든 항아리로, 최길회란 도공이 순화 4년에 만든 작품이다. 제작연도와 도공의 이름까지 알 수 있어 매우 희귀하고 귀한 물건에 속한다. 순화 4년이란 고려 성종 12년(993)을 가리키는 것으로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명문을 가진 청자이다. 고려 태묘는 성종 8년(989)에 착공하여 11년(992)에 준공하였으므로 이 항아리는 태묘가 준공되고 다음 해에 만들어진 것이다. 고려태묘는 경기도 개풍군 영남면 용홍리에 그 터가 있다.
이토 마키오. 도자기 수집에 있어서 일제 때 최고의 권좌를 한 번도 빼앗겨 보지 않은 전문가로 동양제사(東洋製絲) 사장을 지냈다. 일정 초기에는 골동상 곤도에게서 도자기를 배우고는 청자금채입상감대접과 백자향로 등 지정 국보를 여러 점 가지고 있었고, 특히 청자금채입상감대접과 백자향로 등 지정국보를 여러 점 가지고 있었고, 특히 청자흑유백회당초문매병까지 가지고 있던 인물이다. 그는 매우 운이 좋은 사람이다. 일본이 패망할 것을 단파 라디오를 통해 미리 알고는, 수집했던 고미술품을 한국인과 가까이 지내던 일본인에게 모조리 팔아서 돈으로 챙긴 뒤에 유유히 사라졌다.
이 청자항아리는 친구였던 스즈시게에게 팔았는데, 스즈시게는 소장했던 일급품들을 모조리 이 땅에 남겨두고 떠나야 했다. 하지만 백자 명품이 열릴 때마다 약방의 감초격인 백자철사호죽환문호(白磁鐵砂虎竹環文壺)는 해방전에 운 좋게 일본으로 옮겨놓았다. 이런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순화4년명청자항아리가 이제는 장규서에게 손짓을 보내는 것이다. 불행 중 다행인지 석진수는 그 항아리가 일제 때 보물로 지정된 명품인지를 까맣게 몰랐다.
"이 청자 항아리는 얼마나 가죠?"
시치미를 뗀 장규서가 이것저것의 값을 물어 보다 마침내 청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잡동사니와 함께 있으니 결코 비싸게 부를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속마음은 여전히 불안하고 초조했다. 혹시 주인이 눈치를 채고 큰 값을 부르거나 아니면 '그 물건은 파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하면 낭패일 수밖에 없었다.
"3만 환만 주세요. 완전해요."
안도의 숨을 내쉰 장규서는 다 잡은 물건이라 생각하고 능청을 떨었다.
"이게 그렇게 값이 나갈까요?"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항아리를 들어 올려 굽바닥을 보았다. 그러자 그곳에는 마치 '나를 보아 주세요.' 라고 말하듯 글자가 빛을 내고 있었다.
"일본 사람들이 좋아하게 생겼어요."
주인은 오히려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자 장규서는 쐐기를 박을듯이 일침을 놓았다.
"처음 거래이니 깎아 달라고 할 수 있겠어요?"
물건을 싸 가지고 나오는 장규서의 발길은 하늘로 날아갈 듯이 가벼웠다.
비록 비교적 조악하고 기술이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아무 문양이 없는 황청색 때깔이 마치 손으로 비벼 만든 것처럼 소박하여 풋풋한 기운이 풍겨 나왔다. 명품을 그야말로 거저 얻다시피 입수한 것이다. 그는 곧장 이화여대로 가 김활란 총장에게 넘겼다.
세상 물건에는 모두 때에 따라 임자가 있다는 말이 있다. 이 청자항아리는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237호로 지정되고, 혼란기의 기구한 운명을 겪으면서 영원한 안식처로 들어가 지금도 이화여대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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