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제일의 청사진사연화문표형주자

 청사진사연화문표형주자(靑磁銅畵蓮花文瓢形注子, 국보 제 133호),이 주전자는 높이가 32.5cm나 되는 당당한 크기이다. 조롱박 모양 혹은 피기 직전의 연꽃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는데, 생활 주변에서 작품 소재를 찾은 고려 사람들의 높은 예술 감감과 심미안을 알 수 있다.

 주전자는 1963년경, 강화도에 있는 최항(崔抗, ?~1257)의 무덤에서 묘지석(墓誌石)과 함께 출토되었는데 장식수법이 진사와 상감 그리고 양ㆍ음각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어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명품이다. 또한 주전자를 장식한 갖가지 장식의장을 보면 그 모양새가 매우 창의적이고 아름답다.

더구나 제작년도까지 추정할 수 있어 고려청자의 발달과정을 연구하는 시금석(試金石)이 된다.

 

청사진사연화문표형주자│1963년 강화도 최항의 묘에서 묘지석과 함께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며, 도자기가 갖추어야 할 때깔, 문양, 형태에서 완벽한 조화를 보인다. 이병철이 일본에서 되사왔다고 하는 비화와 한국내에서 구입했다는 비화가 함께 전해진다. 세계 10대 도자기의 하나이다.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특히 동체(胴體) 전면에 피어오르는 연꽃 봉오리를 조각한 것이나, 병목에 연꽃 봉오리 줄기를 안은 동자 인형을 배치한 것이 고려청자 중에서 가장 경허하고 청정한 분위기를 느끼게 해준다. 도자기가 갖추어야 할 때깔, 문양, 형태에서 눈이 부시도록 완벽하여 세계 10대 도자기의 하나라는 극찬에 머리가 저절로 끄덕여진다.

 

어떤일이 있어도 찾아오시오 1970년 초, 일본에 있는 오사카시립박물관에서 경매를 겸한 특별한 전시회가 열렸다. 전시 규모도 대단했지만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들 작품이 출품되어 개막도 하기 전에 매스컴이 떠들썩했다. 이 전시회에 출품된 작품들 중에서 백미는 단연코 '청사진사연화문표형주자'였다. 그런데 이 주전자가 어떻게 일본으로 반출되었는지는 철저하게 베일에 싸여 있었다.

 주전자는 윗도리가 꽃봉오리 모양이고 아래위가 조롱박 모양으로 비록 주구(注口)와 손잡이 윗부분이 수리되었으나 걸작 중의 걸작이었다. 일본 내에서도 100만 불을 호가해 살 사람이 없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 전시회에 대한 정보가 삼성그룹을 이끌던 이병철에게 들렸다. 그러자 이병철은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우수한 문화재를 되찾아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사진만 보고서도 경배에 임하고자 작정했다. 이병철은 신임하는 중간상과 얼굴을 맞댄 채 사진을 보고 있었다. 그의 두 눈에는 정기가 번뜩였다. 입술을 지그시 깨물던 이병철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도대체 어떻게 일본으로 건너갔지요?"

 "일찍이 고려청자의 우수성에 눈을 뜬 일본인은 장총을 들이밀며 고려 고분을 모조리 도굴했지요. 대략 6만여 점에 이르는 고미술품이 해외로 반출되었고, 일본에만 3만여 점이 넘게 있어요."

 

 일본인들은 천성적으로 고미술품을 즐기는 민족이다. 특히 한국의 고미술품이라면 사족을 못 쓰고 좋아한다.

 "일본을 다녀오시오. 어떤 일이 있어도 찾아오시오."

  중간책은 즉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며칠 동안 정황을 살핀 그는 시간을 맞추어 경매장으로 들어섰다. 입구에서부터 다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돈을 많이 준다면 쉽게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국익에 위배되는 행위다. 가장 적당한 값으로 되찾아야 했다. 오사카 박물관은 일본 내에 굵직한 수직가와 관람객들이 몰려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경매장 중앙에 자리를 잡은 중간책은 주전자가 책상 위에 올라오기만을 기다렸다.

 드디어 경매 분위기가 한참 고조되었을 때 사회자의 책상 위에 신광이 번뜩이는 청자주전자가 올려졌다. 비록 비국 후리아갤러리에 크기와 형태가 같은 청자가 또 있지만 그것은 뚜껑이 없는 불완전품이다. 사회자의 책상 위에있는 주전자는 온전한 것이다. 중간책은 땀을 닦으며 경매에 임할 마음의 자세를 가다듬었다.

 

 경매가 시작되고, 처음부터 천문학적인 거금으로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 경매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은 천문학적인 거금에 연실 마른침만 삼켜 댔다. 서로 가격을 치고받는 사이에 3천만 원이 넘어 섰다. 경매장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3천 5백만 원."

조용. 땅!땅!땅!

 낙찰을 알리는 경락봉이 힘차게 울리고, 이곳저곳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3천 5백만 원(圓).

 비록 우리 것을 거금을 주고 다시 산 격이나 그 뒤에는 돈보다 더 중요한 사명감이 숨겨져 있었다. 이 청자주전자는 1970년 12월 30일 국보 제 133호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한국 골동계에 떠도는 비화는 상기의 '문화의 향기 30년(삼성문화재단)'의 것과는 전혀 다르다. 이 청자진사연화문표형주자는 1963년경에 강화도에서 도굴된 것을 김재숭(金載崇)이 5천만 환에 매입했는데, 화폐 개혁으로 5백만 원으로 이야기 하기도 한다.

 그는 비밀리에 10년 가까운 세월을 소장했는데, 이것은 도굴품으로 문화재보호법의 법적 시효를 넘기기 위해서였다. 법적 시효가 지나자, 김재숭은 먼저 이 주전자의 수리를 안동호에게 맡겼다. 안동호는 도자기 수리 전문가로 손잡이의 위쪽과 주구(注口) 부분을 보름이나 걸려 수리하였다. 며칠이면 충분한 일인데, 오랜 시일이 걸린 것은 워낙 명품이라 원매자를 찾기 위함이었다는 말도 있다.

 

 이 주전자에 눈독을 들인 사람은 차명호였다. 수리가 끝나갈 무렵, 그는 이 사실을 이화여대 김활란(1899~1970)박사에게 알렸고, 주전자를 본 김 박사는 무척 탐을 내며 사고 싶어 했다. 그런데 미국 후리아갤러리에 같은 모양이 청자가 있다고 하자, 구매에 앞서 그 주전자를 보러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 사이에 이병철이 장형수를 중간책으로 내세워 3,500만 원이란 거금을 주고 구입했다는 것이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김활란은 대단히 아까워했다고 하며, 김재숭은 감옥살이를 면하려고 그때 받은 돈 거의 전부를 탕진했다는 풍문도 있다. 이 청자 주전자에 대해 굳이 현재의 값을 매긴다면 2백 50억 원은 호가한다고 모 고미술 잡지가 발표하였다. 당시 20만 원하던 청화백자필통이 현재 10억 원을 호가하니, 거래 가격인 5백만 원과 또 국외 전시 출품 때에 산정된 보험료 등을 감안하면 그 정도는 족히 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