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흙이 된 아사카와 다쿠미

 외세의 침략을 당하면 가장 먼저 그 나라의 고미술품이 약탈당한다. 현재 대영박물관이나 루브르박물관에 있는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문명의 문화재를 보면 그 사실이 확연히 드러난다. 이집트 상형문자 해독의 열쇠가 된 대영박물관 소장의 로제타스톤 역시 1799년 나폴레옹의 이집크 원정군에 의해 나일강 어귀의 로제타에서 발견된 후 1801년 아부키르 전투에서 영국에 패배한 프랑스가 평화조약 대가로 영국에 넘겨준 것이다.

 

로제타스톤은 고대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송덕비로 재질은 현무암이며, 그리스 문자와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 그리고 속자(俗字)등 세가지 서체가 새겨진 세계적인 금석학 문화재이다. 이집트는 정부 채널을 통해 계속해서 이 문화재의 반환을 요구하지만, 영국 정부는 '영국의 재산' 이라며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20세기에 들어서 굴욕의 일제 식민지와 미ㆍ소 군정기를 거친 이 나라 또한 조상이 남긴 무수한 문화재를 해외로 빼앗겨야 했다. 지금까지 이 땅에 남아 있는 문화재가 오히려 행운하이고 다행스러울 따름이다.

그러나 박물관과 미술관에 진열된 국보급 문화재가 지금까지 살아남아 우리를 반기는 데는 그 한점을 목숨처럼 사랑하며 지켜 낸 선각(先覺)들의 자랑스러운 애국심 덕분이다.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

 이 글은 서울 망우리 공원 묘원에 있는 어느 묘 앞에 새겨진 비문(碑文)이다. 이 무덤의 주인은 우리의 찻그릇, 깨어진 도자기 파편, 그리고 정담이 오갔던 상[소반]을 통해 이 땅과 한국 사람을 무작정 사랑했던 한 일본인이다.

 아사카와 다쿠미(1891~1931). 우리말을 유창하게 사용하고 한복에 김치 먹기를 좋아했던 사람이다. 자기의 장례비조차 남겨 놓지 못할 정도로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한국인의 자식을 위해 장학금까지 내놓았던 우리와 가장 친한 이웃이다.

 

아사카와 다쿠미│조선의 흙이 된 일본인으로 우리 민예품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졌다.

 

 전차 안에서 한국인으로 오해한 일본인이 자리를 비워 달라고 말하자, 아무런 항변도 하지 않고 자리를 내 준 사람이다. 31살의 한창 나이로 폐렴이 악화되자, '죽어도 한국에 있을 것이오. 한국식으로 장사를 지내 주세요'라고 유언을 남겨 이웃의 한국인들이 서로 상여를 메겠다며 다투었다고 한다.

 동경 대학교의 하루키 교수가 '땅에 몸을 붙이고 어두운 밤에도 제 몸에서 빛을내어 주위를 밝게 하는 그런 사람' 이라 평한, 다쿠미는 야마나시 현에서 농림학교를 졸업한 뒤에 23세의 나이로 조선 땅을 밟았다.

 

그가 조선에서 산 삶은 지극히 평범하였다. 이 땅을 도륙하는 높은 지위도 아니고 한국인이 벌벌 떠는 순사도 아니었다. 조선총독부의 산림과 용원, 조선임업시험소의 평직원으로 17년간 일했을 뿐이다. 그런 그에게 어떻게 하여 그토록 아름다운 찬사가 내려졌을까?

 

 '조선도자의 귀신' 이란 평을 들은 형 아사카와 노리다카를 통해 조선 민예에 빠져 든 그는 수입을 쪼개 도자기와 소반을 틈틈이 수집했다. 우리의 소반과 장롱을 닦고 어루만지던 그는 민예품에서 고아하고 견고하고 지극히 편리한 굉장한 미를 발견했다.

 '조선의 소반은 순박하고 단정한 자태를 지니면서도 우리 일상에 친숙하게 봉사하고 세월과 더불어 우아한 멋을 더해 간다. 공예의 올바를 표본이라 할 것이다.'

 미처 우리가 우리의 전통미를 발견하지 못했을 때, 그것을 남보다 먼저 알고, 느끼고, 또 몸과 마음으로 그 미와 하나가 된 인물이다. 그는 우리의 민예에서 받은 미적 충격을 '조선도자명고(朝鮮陶磁名考)', '조선의 소반'이란 연구 자료로 펴내어 도자 연구의 길잡이 노릇을 하였다. 그것은 전국의 흩어진 가마터를 두 발로 뒤지고 다녀서 얻은 결과로, '조선도자명고'는 한국 사람도 모르는 그릇 본래의 이름과 쓰임새를 자세히 정리한 책이다. 연구 논문이 나오자, 야나기 무네요시는 다쿠미의 안목을 극찬했다.

 '조선 민예의 아름다움에 눈이 활짝 뜨이게 되었다.'

 그는 영원히 한국인이고 싶어 죽어서도 한복을 벗지 못한 것이었을까? 이문동에 있었던 그의 묘를 1942년 망우리로 이장하기 위해 묘를 팠을 때다.

 '그는 단정한 조선옷을 입고 동그란 로이드안경을 낀 묻힐 때 모습 그대로였다.'

 

 조선 근대사를 연구한 쓰다주쿠 대학의 다카사카 교수의 회고 내용이다. 일제의 수탈이 극에 달했던 시절, 무일푼으로 이 땅에 들어와서는 대지주로 군림하며 가난한 농민을 수탈하여 부를 쌓고, 그 부를 밑천으로 우리 문화재를 마음껏 수집해 즐긴 악명 높은 일본인들 틈에서 다쿠미의 애정 어린 넋두리는 청량수와도 같이 가슴을 시원하게 적셔 준다.

 '피곤에 지쳐 있는 조선이여. 남의 흉내를 내느니보다 자신이 지니고 있는 소중한 것을 잃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자신에 찬 날이 오게 될 것이다. 이는 공예의 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