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3ㆍ1 운동은 개항 이후 일본인의 이주와 조선인 공동체의 파괴, 일본인의 경제력 장악과 조선인 상권의 쇠퇴 등 조선인의 '동래'가 일본인의 '부산'으로 변신하는 과정에 대한 조선인의 대응이었다. 1919년에 전국적으로 일어난 3ㆍ1운동은 일제시대 민족해방운동을 상징하는 일대 사건이었다. 식민 지배를 받았던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는 찾기 어려운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가장 광범위한 지역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참여하여 3개월동안 진행된 3ㆍ1운동은 비록 민족해방을 바로 쟁취하지는 못했지만 세 가지의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첫째, 일제의 통치방식을 변화시켰다. 수원 제암리 학살사건과 같이 야만적인 폭력을 동원하면서 급한 불을 끈 일제는 3ㆍ1운동의 재발을 막기 위해 무단통치를 문화통치로 변경했다. 둘..
부산근대역사관은 밖에서 보면 2층이지만 내부는 3층이다. 내부공사를 통해 천장이 높았던 1층을 중층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1층 내부가 비정상적으로 높은 것은 일제강점기의 금융기관이나 통치기구 건물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양식이다. 현재 대구근대역사관으로 활용되는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 건물도 그렇다. 큰 성당에 들어가면 누구나 느끼듯이 높은 천장은 신을 섬기고 우러러보며, 반대로 자신을 낮추어야 하는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자아낸다. 인간에게 신앙과 겸손을 가르치고자 하는 종교 건축물의 한 특징이다. 일반 건물에 이러한 시각적 장치를 들여오는 경우 복종을 강요하는 정치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특히 제국주의는 이러한 시각적 효과를 지니는 건물들을 세워 그들이 지배한 지역에서 근대 문명의 우월성과 제국의 위..
분청사기(粉靑沙器)란 그릇 표면을 백토로 화장한 다음에 유약을 발라 구운 청자라는 뜻이다. 일본인이 미시마(三導)라 부르던 것을 1940년대에 개성박물관장을 지낸 고유섭(高裕燮, 1904~1944)이 우리 식으로 이름을 붙였다. 분청사기는 형태나 문양에서 가장 한국적이며 또 현대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전체적인 느낌은 순박한 시골 청년을 닮았으면서도 박진감 넘치는 자유분방함에 익살까지 가득하다. 이것은 14세기 이후 사대부라 불리는 선비들이 고려사회를 이끌던 가치 관념을 버리고, 유학의 가르침을 따르면서 나타났다. 즉 내세의 극락왕생보다는 사람의 본분을 지키면서도 현실 속에서 더 행복하고 풍족한 삶을 살자는 유학적 현세관이 표출된 것이다. 그 결과 그릇도 실생활에서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을 만들고, 또..
분청사기철화어문호(粉靑沙器鐵畵魚文壺, 보물 제787호), 이 항아리는 높이가 27cm나 되는 당당한 크기면서, 분청사기에 등장하는 모든 장식의장 즉 인화, 상감, 조화, 박지, 귀얄, 철화문 등이 호화롭게 망라된 국내 유일의 에로 유명하다. 주둥이는 비교적 넓고, 어깨에 이르기까지 차츰 벌어진 형태는 아래로 내려오면서 서서히 좁아졌고, 동체 하부는 낮고 작은 굽이 받치고 있다. 한눈에 아담하면서 귀여운 모습이나, 몸체에 비해 굽이 다소 작아 보여 약간 불안정해 보이는 것이 흠이다. 항아리의 중앙에는 두 마리의 물고기와 연꽃이 사실적으로 그려졌는데, 특히 물고기는 백토를 감입한 후 박지 하고, 지느러미는 철채, 형태 선은 백상감, 비늘은 인화기법으로 묘사해 표현이 매우 자유스럽고 대범하다. 또 어깨와..
금동미륵보살반가상(金銅彌勒普薩半跏像 93.5cm, 국보 제 83호), 이 불상은 돈자형(墩子形) 의자 위에 미륵보살이 삼산관(三山冠)을 쓰고 앉아 있는 형태로 삼국시대 말엽(7세기경)의 대표적 미술작품이다. 이 불상을 보고 어느 독일의 박물관 관계자는 '십만 금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진품이다.' 라고 극찬을 했다. 오른손 끝을 뺨에 살며시 대어 명상에 잠긴 보살은 왼발은 내리고 오른발은 왼쪽 모릎에 얹은 반가상의 모습이다. 또 얼굴은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띤 명랑한 표정이고, 천의를 목뒤로 돌려 어깨를 감싼 형태는 부피감과 함께 탄력적이면서 부드러운 율동이 느껴진다. 소박한 삼산보관, 벗은 상체, 간결한 목걸이에서는 단순함이, 가늘고 긴 눈, 오뚝한 코, 미소를 머금은 입에서는 자비로움이 서로 절묘한 조화..
청사진사연화문표형주자(靑磁銅畵蓮花文瓢形注子, 국보 제 133호),이 주전자는 높이가 32.5cm나 되는 당당한 크기이다. 조롱박 모양 혹은 피기 직전의 연꽃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는데, 생활 주변에서 작품 소재를 찾은 고려 사람들의 높은 예술 감감과 심미안을 알 수 있다. 주전자는 1963년경, 강화도에 있는 최항(崔抗, ?~1257)의 무덤에서 묘지석(墓誌石)과 함께 출토되었는데 장식수법이 진사와 상감 그리고 양ㆍ음각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어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명품이다. 또한 주전자를 장식한 갖가지 장식의장을 보면 그 모양새가 매우 창의적이고 아름답다.더구나 제작년도까지 추정할 수 있어 고려청자의 발달과정을 연구하는 시금석(試金石)이 된다. 특히 동체(胴體) 전면에 피어오르는 연꽃 봉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