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호도 맹호도(猛虎圖), 이 그림은 길이가 96.0m, 폭이 55.1㎝ 로 호랑이가 뒷다리와 허리를 바짝 올려서 힘과 소리를 감춘 채 방향을 정면으로 막 돌린 자세이다. 배경 없는 구도에 담채로 그렸으나 호랑이의 찰나적 동작이 실감 나게 포착되어 기량 있는 화가의 작품으로 보인다. 그림 오른쪽 위에는 7언 절구의 발문(跋文)과 '갑오남지일(甲午南至日)'이란 간기(干紀)를 써넣어 그림을 그린 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 그 아래에는 빨갛고 네모난 현재(玄齋)라는 낙관이 찍혀 있는데, 발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용맹스럽게 으르렁거리니 어찌 맞설 수 있는가. 동해의 늙은 황공의 마음엔 시름이 인다. 요즈음 드세게 횡포스런 자들 이 호랑이와 똑같은 줄 누가 아리오. 獰猛磨牙孰敢逢 愁生東海老黃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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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철사포도문호(白罐 银砂葡萄文查, 국보 제107 호), 이 백자항아리는 높이가 53.3 cm로 당당한 크기며, 17세기 후반에 궁중의 요(窯)에서 만들어진 걸작 중의 걸작이다. 알맞게 솟은 입에 어깨는 둥글고 풍요로우며 허리 아래로는 힘차면서도 대담하게 좁아져 아랫도리의 맵시가 한층 돋보인다. 또 철사(概秒) 포도 덩굴은 멋지게 뻗었고, 넓적한 포도 잎 사이로는 붉 은 포도가 주령주령 열렸다. 포도 덩굴이 뻗어 나간 자취부터 순리에 따랐고, 그림이 차지한 공간도 더없이 적절하다. 마치 순백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듯하다. 그림을 그린 필체 또한 능숙한데, 알맞은 볼 온도에 초벌구이해서 선비의 고절한 문기 (文氣)가 절절 흐른다. 시미즈 고지(清水幸大), 그는 일제 때에 조선 철도(주)의 전무로 근무..
망우리에 있는 망우산은 1933년부터 서울 ( 경성 )의 공동묘지로 이용되어, 일제시 대의 많은 역사적 인물들이 묻혀있다. 망우리 공동묘지로 불리다가 1999년에 공원화 작업이 이루어져 현재는 묘지공원으로 조성돼 망우리 공원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1973년에 만장 ( 滿葬 ) 되었고, 2009년 현재 부지 1,758,877㎡ 에 묘수 15,383기가 있다. 망우리 공원에 조성된 산책로는 관리사무소에서 출발해 동락천 약수터 방향과 용마산 방향으로 나눠진다. 산책로는 관리사무소에서 출발해 다시 처음 위치로 아오는 총 5.2 km의 거리이다. 망우리 공동묘지는 양지바른 동쪽 ( 경기도 방향 )부터 무덤이 들어선 후 점차 서쪽( 서울 방향 )으로 확대되어 갔다. 따라서 현재 망우리 공원의 많은 무덤들이 동쪽에 ..
1945 년 11 월 대한민국임시정부 ( 이하 임정 ) 주석 김구가 귀국했다. 그리고 김구는 이듬해인 1946 년 7 월 7 일 일본에 버려져 있었던 윤봉길 ( 尹奉吉 ), 이봉창 ( 李奉昌 ), 백정기 ( 白貞基 ) 삼의사의 국민장을 치룬 뒤 이곳 효창공원에 안치했다. 삼의사는 모두 목숨을 건 의열투쟁을 벌였고 젊은 나이에 죽었다. 윤봉길은 25 세 에, 이봉창은 33 세에. 백정기는 39 세에 죽었다. 희생은 정당성을 상징한다. 특히 젊기에 그 희생은 더욱 순수하다. 해방 직후 젊은 죽음에 대한 애도와 안타까움, 자랑스러움 등이 결합되어 치러진 국민장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앞장에서 서술했 듯이 이는 과거 입정을 중심으로 정국을 주도하기 위한 김구의 정치적 기획의 측면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김구는..
1937~1945년 기간은 일제가 도발한 전쟁을 뒷받침하기 위해 허구적인 '내선일체'구호 속에 조선의 인력과 물자가 철저하게 동원되고 수탈되는 폭압적인 통제체제가 구축된 시기였다. 당시 조선인들은 이에 휩쓸려 소모되면서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저항했다. 독서회를 비롯한 비밀결사운동, 동맹휴학 등의 조직적인 저항에서 노동자의 의도적인 태업, 일자리 탈출과 같은 개인적인 저항에 이르기까지 수타로 인한 삶의 피폐화에 대해 끈질기게 저항했다. 중일전쟁 이후 일제 경찰의 검거 상황을 보면 사상사건의 경우 1937년 201건/2,600명에서 1942년 586건/2,872명으로, 치안유지법 위반사건의 경우 1937년 91건/1,265명에서 1942년 172건/1,528명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저항의 빈도는 늘어났다. 물..